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오츠카 야스오 (문단 편집) == 생애 == 원래는 애니메이터가 될 생각은 없었고 승려나 기관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시네마현]]에서 태어나서 2살 때 [[야마구치현]]으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야마구치현]]에서 [[증기기관차]]를 처음으로 보고 감동을 받고 스케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어디에도 증기기관차를 찍은 사진이 실린 잡지나 화보를 찾을 수가 없어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그렸다. 그때 그린 그림은 전부 소중하게 보관해서 나중에는 화집으로 출판도 했다. 그는 수집광 기록광적인 성격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일기도 쓰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서 훗날에는 작화 땀투성이(作画汗まみれ)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소중한 자료를 출판하기도 했다. * 전후에는 점령군 [[미군]]의 [[지프]]에 심취해 지프의 구조가 알고 싶어 지프를 너무 자세히 스케치하자 미군에서 스파이로 알고 취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다가 꿈이 만화가로 바뀌게 된다. [[https://twitter.com/doctoruwatson/status/1357304625364275200|#오오츠카 야스오의 자동차, 만화 스케치.]]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린 학생 신분인데도 [[징용]]을 당해서 약 2년간 [[규슈]] 등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 당시 이런 식의 강제 징용은 흔했고, 중고등학생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까지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강제 노동은 일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추리소설가였던 [[야마무라 미사]]는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의 서울에 살았는데 그녀도 어린 나이에 징용을 당해 노동을 해야했다.] 1945년 8월에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강제 동원 노동을 하다가 패전을 맞이했다. 학교로 복학했다가 중퇴를 하고, 1951년에 [[야마구치현]] 현청에서 공무원으로 취업을 했다. 그러나 다음해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도쿄]]로 상경한다. 1952년 후생성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도쿄도에서 [[후생노동성|후생성]] [[마약]] 수사과(현 [[후생노동성 마약취체부]])에서 일했다. 사실 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고 당시엔 종전 후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세계의 감시를 받고 있어 이동과 거주에 제한이 있었다. 도쿄로 가서 만화가를 하고 싶으면 공무원이 되는 수 밖에 없어 공무원 시험을 친 것이라고 한다. * 일명 'G맨' 또는 '마토리'라고 불리는 마약취제관은 직업 특성상 호신용 권총 소지가 허가받았는데, 오오츠카도 일반적인 일본인은 만져보지도 못 하는 본인 권총을 소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권총을 쏘는 장면은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고 리얼리티가 있으며 이때 자신이 다룬 총기는 [[루팡 3세]]에 그대로 나왔다.[*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배운 미야자키 하야오도 총기 묘사가 절묘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무스카]]가 권총을 쏠때 반동을 표현한 것을 보면 실제로 권총으로 몇 백발은 쏜 사람이 그린 것 같아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오오츠카는 보조 직원으로 지문 채취와 총기 관리와 손질 담담이라서 총을 만질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A프로덕션]] 시절에는 [[모델건]] 장난감총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쉬는 시간에는 애니메이터 동료들에게 모델건을 주면서 총쏘는 포즈를 잡아 보라고 시켰다고 한다. [[소련]]의 애니메이션 [[곱사등이 망아지]]를 보고 애니메이션에도 흥미를 느꼈지만, 인생의 목표는 정치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였다. 공무원 일과 만화가가 되려고 만화가 수행을 병행하며 만화계의 문을 두들겼으나 별로 반응이 없었고 과로로 [[결핵]]에 걸려 2년간 요양생활을 보냈다. 이때 프랑스의 애니메이션 영화로 훗날 [[왕과 새]]로 리메이크되는 [사팔뜨기 폭군](1955년 일본에서 극장 개봉)을 보고 만화가를 포기하고 애니메이터가 되기로 결심한다. [[1956년]] 6월 도쿄 타임즈와 요미우리 신문 기사에 난 "[[토에이]]가 컬러 장편 만화 영화[* 이 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이 용어는 60년대 중후반~70년대나 되어서나 나왔다.] '[[백사전]]'의 제작을 시작한다"라는 글을 보고 신바시의 토에이 교육 영화부에 찾아갔고, 토에이 측에서 일본동화사(日本動画社)로 가라 해서 이후에 토에이와 합병을 하기로 결정이 난 일본동화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한다. 이윽고 [[토에이 동화]](토에이 애니메이션)가 창립하고 정식 공채 직원 1기생이 되었다. 처음에 토에이 측에선 공무원을 하던 사람이 애니메이터 같은 시궁창 일을 하겠다니까 기겁하면서 입사면접을 보던 토에이 동화의 사장과 임원들이 공무원직을 그만두는 것은 아깝다. 당신은 나이도 많고(당시 26세) 이제와서 그림을 하기보단 하던 공무원 일을 계속하라고 설득했으나 오오츠카 야스오는 죽어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토에이에서 받는 신입사원 급여는 공무원을 하던 때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토에이는 [[모리 야스지]]에게 오오츠카 야스오를 가르쳐보라고 했는데 원래 재능이 있고 꾸준히 연습을 해서 크게 가르칠 건 없었고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활약을 했다. 오히려 모리 야스지가 아니라 다이쿠하라 마코토(大工原章)에게 작화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동화맨의 양성 기간은 6개월로, 2달 마다 테스트가 있어서, 불합격 되면 시아게(단순한 채색 공정)으로 떨어지고, 좌절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오오츠카는 2달만에 합격해서 몇 가지 단편 작품을 거치고, 토에이 동화가 심혈을 기울인 장편 대작인 [[백사전]](1958년도 개봉)에서 제2원화(후반에는 제1원화)를 담당했다. * 참고로 당시의 토에이 동화는 같은 업종인 [[애니메이터]]라도 실력에 따라 구분을 해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은 극장용 애니메이터 팀으로, 그 다음은 텔레비젼용 [[TVA]](1963년부터), 그 다음은 짧은 상업용 TV 광고 제작팀으로 배치되었다. 극장용 만화영화 제작팀에 소속되는 것은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 애니메이터 뿐이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원화를 그리는 실력있는 사람이 약 10명 정도 있고, 그 밑으로 각각 신인 동화맨들이 6~7명씩 따르는 누구누구반 시스템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훗날 [[코타베 요이치]]가 회고하기로는 하나의 팀의 작화반장은 일국의 성주(城主)같아서, 여자미술대학을 나온 여성이 반장인 팀은 여성들만 모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전국시대의 군웅할거처럼 작화반끼리 서로 경쟁했다고 한다. 이후, 액션 장면을 그리는 센스가 뛰어나서 인정을 받아서 그 부문 전문 애니메이터로 활약한다. 오오츠카가 애니메이션의 실력자로 [[백사전]]에서는 [[https://youtu.be/kLpljozKAJg?t=162|파도 장면을 그린]] 사람으로 유명했고, 그가 이끄는 작화반은 다이나믹한 액션과 자연 현상 묘사를 담당했다. 그리고 훗날 한 평론가가 말하길 이팩트 액션 메카닉 작화 등의 여러 분야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이 전까지 스크린에서 횡으로만 좌우로 이동하는 구도의 그림을 공간을 입체적으로 설계해서 위아래 종횡무진으로 캐릭터가 활동하는 구도를 집어넣은 사람이고, 캐릭터의 시점에서 위에서 밑으로 내려보거나 밑에서 위를 쳐다보는 구도라든가를 집어넣었고, [[https://www.sakugabooru.com/post/show/232758|작화부로]] 지금 용어로 [[레이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의 무대 공간의 설계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이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도 영향을 받았다. 토에이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코타베 요이치]]는 오오츠카는 작업 속도가 빨라서 한참 일하고 있다가 뒤돌아 보면 어느새 일 끝내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가, 어느새 다시 나타나고는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일화로는 토에이의 작화반장 두 사람이 호랑이를 그리는 것에 경쟁이 붙었는데, 현장의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호랑이를 자신있게 이것은 이런 식으로 그린다면서 설명해 가면서 쓱싹쓱싹 그리는 것을 보고, 그의 그림 실력과 그 동안 열심히 연구했구나 라고 그 내공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토에이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호랑이가 주요 빌런 캐릭터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1963년작 멍멍 [[츄신구라]]([[https://ja.wikipedia.org/wiki/%E3%82%8F%E3%82%93%E3%82%8F%E3%82%93%E5%BF%A0%E8%87%A3%E8%94%B5#%E3%82%B9%E3%82%BF%E3%83%83%E3%83%95|わんわん忠臣蔵]])이며[[https://youtu.be/f8uIXv57exs?t=653|유튜브]], 코타베 요이치는 이 작품에는 원화맨으로 참여했다. 전후 일본은 가난했고 임금도 낮아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1959년에 시도했던 제1차 노조결성에서 오오츠카는 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는데 회사가 압력으로 실패했고, 1961년에 결성된 토에이 동화 노동조합에서는 제1대 서기장을 맡았다. 참고로 제2대 서기장은 1963년에 입사한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노동 운동가이기도 하며 애니메이터에 대한 대우가 안 좋았던 [[토에이 동화]]의 대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노동조합용의 사내 신문의 편집일도 하고 일러스트도 그렸다고. 밤 2시까지 1장짜리 [[등사]]판 신문을 만들어서 그 날 아침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1965년에 토에이 노동조합이 주도하게 되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의 [[작화감독]]으로 발탁되자, [[타카하타 이사오]]를 연출직으로 추천해서 그가 첫 극장 연출작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장면 설계를, 코다베 요이치에게는 캐릭터를 맡겼다. 코다베 요이치가 말하기를 그는 자신의 팀원이라서 같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마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을 불러 와서는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조직을 이끄는 리더였다. * 당시의 토에이 동화는 그림을 그릴 줄아는 작화감독의 권한이 훨씬 크고, 연출은 그 아래였다. 작화감독이 전권을 쥐고 연출은 그 보조를 하면서 작업을 돕는 구조였다. 그래서 먼저 작화감독이 정해지고 연출을 작화감독이 정하고는 했다. 막상 타카하타 이사오를 영화 연출로 추천하자 그는 느리다고 주변에서 반대하는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부터 "[[나무늘보|나마케모노]]"로 유명했다. 그래서 입사 3년차인 신인인 미야자키 하야오를 연출 보조로 끼워넣었더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일을 많이 하고 잘 해서 아이디어를 팡팡 내고 설정 그림을 마구마구 그려서, 오오츠카 야스오는 자서전에서 '난 이 작품에서 [[작화감독]]이긴 했지만 사상적이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전혀 관여를 못 했고, 작품의 스토리나 내용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전부 다 하고 자신은 옆에서 지켜봤을 뿐'이라고 글을 남겼다. 심지어 영화 내용이 뭔 이야기인지도 이해하지도 못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이해했다면 더 잘하고 아쉬움이 없었을 거라고 그게 너무 속상했다는 말도 남겼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는 흥행에 참패했고 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는 받기로 했던 작화감독의 수당이 절반으로 깍이는 등 푸대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루팡 3세]](1971)를 애니메이션화 하고 싶어하는 [[도쿄 무비]]의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의 스카웃으로 1968년에 도쿄 무비 산하의 [[신에이 동화|A 프로덕션]]으로 옮겼다. 루팡 3세는 실제작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무민]]에 작화감독을 맡으면서 참가했다. 이윽고 토에이 노조분규 사태가 발생했고 노조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노조 간부였던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 3총사는 후지오카 유타카와 오오츠카 야스오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여 1971년 6월에 그가 일하고 있던 A 프로덕션으로 이적해 온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A 프로덕션([[신에이 동화]])에서 [[루팡 3세(1기 TV시리즈)]](1971), [[닛폰 애니메이션]]에서 [[미래소년 코난]](1978),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1979)에서 작화감독을 맡았고, 그 외 많은 작품에서 함께 일했다. 미래소년 코난은 미야자키가 그를 작화감독으로 지명해서 원하자, 신에이 동화에서 임원직이었고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도 물리치고 같이 일하면 몸이 힘들 것을 알아서 싫은데도 닛폰 애니메이션사로 파견을 가서 도와준 것이다. 두 사람은 총기류, 군용차, 군용기, 탱크 등 군병기를 좋아하는 [[밀덕]]이기도 했고, [[외제차]]를 좋아하는 취미가 통하기도 해서 사이가 좋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토미자와 노부오]]가 말하길,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실질적인 프로듀서는 오오츠카 씨로, 자신의 급여도 오오츠카씨가 미래소년 코난에서는 원화맨으로 얼마 받았냐고 물어서 18만 엔이라고 대답하니까, 자, 20만 엔 준다고 새로운 회사로 이적했으니까 월급이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며 월급 액수 책정을 오오츠카가 했다고 한다. [* 1979년도에 20만 엔이면 당시의 일본 물가를 고려하면 엄청난 고액이다. 참고로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은 이 때 정직원 사원제였다.] 그리고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감독을 미야자키 하야오가 맡게 된 것도, 오오츠카가 사장인 후지오카 유타카에게 말해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루팡 3세 극장판 1기가 개봉해서 상영중인데, 2기는 오오츠카 야스오가 감독을 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인데, 오오츠카 씨가 머리를 감싸고 뭘 만들까라고 고민하고 있는데 1979년 5월 쯤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홀연히 나타나서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탓에 타카하나 이사오 연출의 [[빨강머리 앤]]의 애니메이션은 개고생을 했다고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와도 그가 감독한 극장판 [[꼬마숙녀 치에|쟈린코 치에]](1981)의 작화감독을 하는 등 좋은 관계였다. 타카하타가 말하길 입사해서 처음으로 배속받은 작화반이 오오츠카 야스오가 이끄는 팀이었고, 애니메이션의 기초부터 가르쳐주었다. 타카하타가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봐도 귀찮아하고 싫은 내색도 없이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1979년에 [[도쿄 무비]]의 새로 생긴 자회사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이적해서 [[리틀 네모]]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텔레콤에는 기술고문으로 남았고 이후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텔레콤으로 가게 된 이유는 신입 사원의 교육을 [[츠키오카 사다오]]가 했는데 교육을 이상하게 해 놔서, 직원 교육이 잘 안되고 있다고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이 와 달라고 부탁해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가보니까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엉망진창 무정부 상태였다. 후일담은 텔레콤 문서 참고. [[토모나가 카즈히데]]는 오오프로에서 [[미래소년 코난]]에서 하청 원화로 참가하고, 오오츠카씨가 오오프로의 사장이랑 친해서 가끔씩 놀러와서 이 사람이 오오츠카 씨인가?라고 존경의 눈으로 바라봤고, 이윽고 오오츠카가 텔레콤의 신입사원의 교육 때문에 골치라서 도와 달라고 불러서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이적해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오오츠카와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가까운 책상에서 일하게 됐는데, 전설적인 그들의 실력과 (하루종일) 일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곳에 와 버렸다. 여긴 올 데가 아니었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은 자동차도 제대로 못 그리고 끙끙거리고 있으면[* 실상은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카 체이스씬은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평도 받았다. 그리고 자동차 씬에서 못 그리고 어려울 때는 오오츠카가 여긴 이렇게 그리면 된다고, 포인트 포인트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 콘티가 워낙 세밀하게 잘 되어 있어서 그 콘티를 원화로 그려내는 것이 어려운 지상 과제였다고 한다. 운전하는 장면에서도 오오츠카가 나중에 수정을 하면 자동차의 중력감이 표현되고 전반적으로 리얼리티가 살아나서 역시나 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뒤에서 미야자키가 오오츠카 씨의 수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큰 소리로 따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고. 그리고 그도 [[명탐정 홈즈]]에서는 그려도 그려도 끝이 없는 원화를 그리면서 실컷 고생했다. 오오츠카는 성격이 꽤나 싹싹한 사람으로 손에 콜라병을 들고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마실래 하면서 한 잔씩 따라주었다고 한다. 40대부터는 허리도 아프고 몸이 많이 상해서 현역에서 은퇴 후에는 주로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과 [[미래소년 코난]](1978)에서 [[작화감독]]을 할 때는 진짜로 힘들어서 문자 그대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렇게 무리 안 하고 스트레스 안 받는 성격을 장수비결로 꼽기도 했다. 1985년에 [[스튜디오 지브리]]가 발족했을 때는 [[스즈키 토시오]]가 집으로 찾아와서 지브리에서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타카하타하고 미야자키하고 함께 일하면 몸이 힘드니까 싫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은퇴해서 몸도 맘도 편하게 살고 싶었다고 한다. 1991년부터 도쿄 [[요요기역]] 부근에 있는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강사로 일을 했다. 2001년에는 애니메이터 육성 프로그램 '아니메쥬쿠(アニメ塾)'의 숙장으로 취임.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02년 일본 문화청 장관상을 받았다. 감독이 아닌 작화 애니메이터가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자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다. 2005년부터는 [[후생성]] 주최의 기능오륜전국대회(통칭 기능 올림픽)의 심사위원도 맡았다. 그 후 여생을 보내다 2021년 3월 15일에 노환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https://moviewalker.jp/news/article/1024386/amp/?__twitter_impression=true|#]] 제자 중 [[사다모토 요시유키]], [[이타가키 신]],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등이 추모글을 올렸다. 그 밖에도 관계자와 팬들이 추모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https://nlab.itmedia.co.jp/nl/articles/2103/16/news082.html|#]] 이 중에는 프로모델 회사 [[타미야]]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